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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우중 교수의 중남미여행 - 에삘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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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3-04 17:11 조회 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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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교수의 중남미 여행] 에필로그 - 한국과 중남미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애니깽으로 시작된 100년 교류 - 한국선 탱고바람이…중남미엔 한류가…

캠프 파라과이. 현지인 여성과의 사이에 난 혼혈아들로 얼굴에 한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한국인 아빠들을 대신해 뉴욕 감리교 교인들이 양부모가 되어 현지에 교육 캠프를 세우고 지원하고 있다.

2002년 한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직후 멕시코시티에서 택시를 탔다. 호기심 많은 중남미인들이 그렇듯 택시 기사가 나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네는 축구도 잘하지, 기술도 좋지, 그리고 미국한테 큰소리도 치지, 하여간 대단한 나라야"라고 너스레를 떤다. 태권도밖에 모르던 멕시코인들이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축구를 다시 보고, 시골 어딜 가도 한국산 가전제품이 즐비하니 기술 좋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미국 운운은 무슨 소린지 몰랐다. 알고보니 당시 북한이 핵사찰 문제로 미국과 옥신각신할 때 뉴스에 '꼬레아'가 많이 나오니까 북한, 남한 구분 못하고 미국에 지지 않는 나라라고 본 것이다.

이젠 베이징 올림픽과 WBC대회서 메이저리거가 즐비한 중남미국가들을 연파했으니 야구에서도 미국을 이기는 나라로 알려지게 될 판이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 베트남에 붙어있다' '대통령이 호찌민이다' 등 얼토당토안하게 한국을 말하던 사람이 많았는데, 이젠 스페인어로 더빙된 '내 사랑 삼순이'를 호텔방에서 보고, 시장 뒷골목 식당 아줌마가 '천국의 계단'이란 드라마를 봤다며 한국인만 보면 친구 만난 듯 반기는 수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멕시코는 우리 한국과 제일 먼저 만난 중남미다. 대한제국이 아직 명목상 독립국일 때인 1905년에 일본 식민회사와의 계약으로 275가구 1천3명의 조선인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 남부 살리나스 항구에 도착한 것이다. 말이 좋아 이민이지 일본상인의 꾐에 팔려간 농노나 다름없었다. 맨 살에 애니깽 선인장 가시가 박히는 혹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한국인의 3~4세 후손들이 비록 현지인과 피가 섞이고, 한국어도 다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1만명 이상이 얼굴 한 켠에 한국인의 모습을 간직한 채 여러 분야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1959년 스페인에 거주하던 안익태 선생이 아르헨티나 북부 지방 투쿠만시 축제 때 방문해 교향곡 지휘를 한 것이 한국인이 맺은 작은 인연이었고, 60~70년대 들어서 우리 정부 스스로의 의지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로 농업이민을 보내면서 한국과 중남미는 큰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농업을 표방한 이 이민 정책은 실패로 끝났으나 중남미에 한국인이 대거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68년과 1970년에 멕시코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잇따라 주최하면서 중남미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즈음 중남미 출신 가톨릭 신부와 수사들이 한국에서 전교와 교육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한국 젊은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당시 활약했던 중남미 사람 중에는 자기네 모국으로 돌아간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현지 진출 한국인들에게 서툰 한국말로 "올해는 한 마리 안 잡나?"하면서 보신탕을 못 잊어하는 이까지 있을 정도다.

70년대 중반 이후엔 종합무역상사제가 도입되고 이의 인증을 받고자 하는 대기업들이 주요 시장의 하나였던 중남미 각국에 지사를 설치하면서 한국의 진출이 본격화하였다. 80년대 들어서는 중남미와 한국 공히 경제·사회적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일반 시민의 저항 운동이 한층 거세게 일어나고, 선거 민주주의가 기틀을 잡으면서 상호간 관심이 커졌다. 1984년의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과 1986년 멕시코에서 두 번째 열린 월드컵에서의 한국팀 선전,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등을 계기로 중남미와 한국 간에 갖고 있던 편견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90년대부터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한국이나 중남미나 대외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국가원수론 처음으로 멕시코를 방문한 이래 현 이명박 대통령까지 모두 중남미를 순방했다. 특히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1+ 중미 5개국' 정상회의와 2005년 노무현 정부때 재차 이루어진 '1+중미 8개국' 확대 정상회의는 한국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남미의 칠레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맺은 FTA 협정은 한국과 중남미 상호 교류 증대의 기폭제가


[사진들: 안데스 지역의 구제 활동, 한국의 '영원한 도움 수녀회'에서 어려운 원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페루의 코라오 도자기 학교.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협력단에서 파견한 봉사단원 및 현지 수강생.
과테말라 소녀의 집. 한국의 마리아 수녀회에서 현지의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정규 기숙사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905년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이민 간 한인들. 선인장 가시에 찔리는 혹독한 환경에서 농노 상태로 일했다.]


되었으며, 여타 중남미 각국 정상과 장관들의 방한 사례는 일일이 꼽기가 어렵다. 이젠 외교통상부 중남미국 산하에 자원협력센터까지 개설될 정도로, 오랜 기간 변방 취급을 받던 한국과 중남미가 21세기 동반 상승을 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따라 자원과 에너지 수요가 늘고, 이의 여파로 세계적으로 1차 생산품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자원이 엄청난 중남미와 제조업이 뛰어난 동아시아국의 교역이 급증하였다.

작년에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마구 흔들렸을 때도 중남미와의 교역량만은 증가세를 이어갔고, 벌써 몇 년째 한국 무역 흑자의 50% 이상을 이 지역에서 거두고 있다. 그 동안 유럽이나 미국 편향이었던 중남미 국가들의 대외관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지게 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고 있다.

6·25전쟁 때 유엔 참전 16개국의 일원으로 콜롬비아가 한국을 도왔는데, 60년 뒤인 오늘날엔 국제협력단(KOICA)에서 바로 이 콜롬비아나 파나마 등 중남미 여러나라에 컴퓨터, 농업, 사회복지, 의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봉사단으로 파견하여 돕고 있다. 마추피추나 이구아수폭포처럼 잘 알려진 곳은 물론이고, 아마존 정글 지대와 숨쉬기조차 힘든 안데스 높은 지역까지 어딜 가나 비즈니스맨, 배낭여행객, 유학생, 공무원 연수자 등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된 한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전자, 무역, 건설 관련 대기업과 협력업체가 나라마다 생산법인이나 판매법인 형태로 포진하고 있고, 과테말라를 비롯한 중미, 카리브해엔 한국계 섬유업체가 200군데 이상 나갔다. 필자가 재직 중인 학과 출신으로만 50명이 현지 취업했을 정도이니 중남미 전역에 진출한 한국인 규모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엔 유럽계 백인국가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동양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아르헨티나나 칠레 같은 나라에서 한국학 학술대회라도 열면 현지인 학자만 100~200명씩 참가해 성황을 이루고, 한국의 대학과 교류를 요청하는 대학이 급증한 것도 전례없는 일이다. 현지 종업원들 임금을 체불하고 야반도주하는 업주, 교회건 친목 단체건 감투나 이권 때문에 패를 갈라 싸움질하는 사례,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 난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는 남자 등 '어글리 꼬레아노'가 중남미에 비친 한국의 어두운 면이라면, 이런 혼혈아나 현지 원주민 고아를 수백명, 수천명씩 모아 먹여주고, 가르치는 한국계 종교 단체나 후원 기업의 '희생적 꼬레아노'는 훈훈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한때는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태도가 현지인들에게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IT 분야와 송유관, 발전소, 교량, 플랜트 등 건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속도전에 능한 한국인들이 환영을 받고 있다.

예전에 한국에 오는 중남미인들은 대개가 정부 고관급이었지만, 지금은 수천명의 서민 출신 근로자들이 국내 중소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엔 이런 근로자 외에 원어민 영어 강사의 배우자로 체류하는 라티나들이 문화 전파에 일익을 맡고 있다. 전국 주요 도시엔 살사나 탱고바가 곳곳에 생기고 있으며, 차차차, 룸바 등 라틴 댄스스포츠 강좌도 인기를 끌고 있고, 중남미 화가 작품전을 석달가량 진행해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문화 행사에 뜨거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이제 우리 한국인도 경제 논리로만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하나의 징표이다. 반대로 한국의 문화계 인사나 단체의 중남미 현지 발표회와 공연도 매년 늘어나고, 이들이 쓴 기행문을 포함해 중남미 여행기가 서점에 수십 종류나 나옴으로써 한국의 대 중남미 관심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중남미와 아시아의 만남은 향후 국제협력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며, 과거의 역사를 서로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예견해온 태평양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나갈 것이다.

편린이나마 중남미의 이모저모를 알리려 했으나 부족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과 함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2009-04-02 08:04:10 입력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90402.0102007565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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