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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에서 맛본 감격 - 박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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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3-04 17:07 조회 3,30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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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30일 우리 내외는 시집간 딸을 4년 만에 보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거쳐, 30시간만에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남반구에 위치한 그 나라는 우리나라가 여름이면 겨울이었고, 정오이면 자정으로 정반대였다. 우리나라와는 반대편 지역으로 땅이 넓은 반면 사람은 적고, 몇 달 사이에 대통령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정치와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방문했을 때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달러화 대 페소화가 1대3이었지만, 7월6일 귀국할 때는 1대4일 만큼 어려웠다. 게다가 집값은 5분의1로 떨어지고, 경찰관이 100m 간격으로 방탄조끼를 입고 서 있을 만큼 치안상태가 심각했다. 다행히 사위가 한국대사관 현지인으로 근무하여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세계에 나가있는 6백만 한국교포 중 유일하게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한창 때는 4만8천명이던 교포가 현재는 8천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니 얼마나 나라가 어려운지 가늠할 수 있었다.

때마침 벌어지는 한일월드컵이 궁금해 아르헨티나에 가면서도 축구의 나라가 아무리 어려워도 최소한 축구중계는 해주리라 믿었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월드컵에 출전한 감독도 9개월째 급여를 못주어 16강에 오르면 상금을 타서 주겠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TV에서 축구중계는 하리라 생각했지만 아르헨티나와 중요국가만 나와 한국전은 시청하기 힘들었다. 한때는 세계 부국 중의 한 나라였는데 그래도 중계는 해주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딸과 함께 여러곳을 여행하던 중 남쪽으로 1700km떨어진 스위스인들이 많이 사는 바릴로체에 가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의 첫승을 맞이했는데, 그날 저녁에 자동차 클랙션 소리와 시민들의 환호성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450km 떨어진 해변도시 마르델쁠라따에서 만난 사람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긴 그날 저녁 거리에서 '코리아!'를 외치면서 엄지손가락을 보여주던 나이 드신 분, 그리고, '코리아?'라고 물으며 손을 잡는 이도 있었다.

유일하게 TV로 한국전을 볼 수 있는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학교였다. 대사와 교민들이 꽉 들어찬 학교강당에서 스페인과의 8강전을 시청하였다. 승부차기에서 우리가 이기는 순간 펄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탁자가 갈라지고 넘어지기까지 했다. 한국이 4강에 오르니,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서 2백여대의 차가 아르헨티나 국기와 태극기를 달고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그와 함께 시민들이 쳐주는 박수는 나를 더욱 감격스럽게 했다. 참으로 얼마나 기쁜 날인지 모른다. 해외에서 월드컵을 맞이한 감회는 남달랐다. 얼마나 감동했던지 목이 메이기까지 했다.

그 곳 한국인 천주교회 미사 강혼시 신부님은 우리나라가 16강이 첫 번째 목표였는데 4강까지 오른 것은 도저히 상상을 초월한 승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르헨티나에서 유일하게 구입한 것은 붉은 잠바 하나였다. 그곳에서 듣기를 한국에서는 붉은 옷을 입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갈 수 없다는 소식은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붉은 악마란 이름은 좋지 않지만 지난해 월드컵 4강 진출은 히딩크 감독의 작전도 있지만, 온 국민의 열의와 하나됨이 원동력이었다고 본다. 앞으로 해외에 나갈 때는 'KOREA'와 태극기가 부착된 유니폼과 모자를 쓰고 갈 작정이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첫 출전한 이후 48년만에 4강에 오른 그때 그 순간은 두고두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일대 사건임에 분명하다.

아~ 대한민국 만세 ...

그런대한민국이 자랑스럽기보다 내 자신이 그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감격스러웠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좋은 시절이 있었던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2002년 6월의 한일 월드컵대회는 자자손손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선조들의 기상으로 기억될 것이다.70일간 해외에 체류하면서 맞이한 월드컵은 한국 땅에서 직접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한 국민들만은 못해도 지구 반대면에서 맞이한 것은 크나큰 보람이었다.

이과수 폭포쪽은 여름이고 남쪽은 눈이 1미터나 쌓여있는 넓은 땅과 풍부한 자원, 쇠고기가 1킬로에 1100원, 홍어 한 마리가 5천원, 조기 한 마리가 천원, 300가지의 음식이 있는 뷔페가 2400원, 맥도널드 세트가 800원인 나라가 아르헨티나이다.

천칠백킬로의 거리를 21시간이나 달리는 2층 18인승 고속버스 왕복요금이 4만원, 브룩쉴즈 오빠 같은 미남들이 교대로 운전하면 화장실은 물론 180도 꺽어지는 의자, 비행기 1등석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나라, 1억마리의 소 자원이 있는 데가 바로 아르헨티나이다.

20시간을 가야 산이 보이는 옥토를 가졌지만 차는 90%가 소형이며, 2002년 4월 중에는 새차가 한 대도 팔리지 않은 나라, 차 내부의 라디오는 물론 타이어나 문짝이든 돈이 되면 다 뜯어가는 한심한 나라, 쓰레기가 검정비닐에 싸여 아파트에 버려지면 골라가는게 아니라 통째로 가져가는 나라, 고기와 과일이 싸 거지도 배불리 먹고 사는 나라이지만 그래도 경제는 파탄국이다.

여전히 페소화 가치가 떨어져 있지만 다행히 지난 5월25일 네스토 기르흐네르라는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그는 2001년 12월 페르난도 델라루아 전 대통령이 긴축정책에 분노한 시위대에 굴복, 사임한 이래 다섯 번째 대통령이다.

남한의 26배나 되는 큰 땅을 가진 반면 인구는 3700만명밖에 안 되는 축복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오늘날 어렵게 사는 것은 결국 페론당의 노조활동이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자원이 풍부하고 여건이 좋아도 정치경제가 어려운 그곳을 보고 우리도 한국적인 민주정치를 하여 대대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2002년 6월의 월드컵은 우리 모두에게 벽을 허물고 열린 광장으로 나가도록 했다. 전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던 붉은 물결의 열기는 아래, 위층간의 대화가 없던 때에 아파트베란다로 나가 만세를 부르는 감동과 눈물을 쏟게 했다.

대한민국국민이 건국이래 강력하게 일체감을 조성하고 에너지를 발산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태극전사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것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폴란드전, 미국전, 포르투갈전, 이탈리아전, 스페인전, 준결승전, 결승전 등 월드컵 경기장면을 모두 녹화해 두어 지금도 가끔씩 짜릿한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있다. KBS-TV에서도 한일월드컵 1주년을 맞아 5월26일부터 재방송하여 눈물겨운 순간을 다시 한번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붉은 티셔츠는 대한민국 월드컵의 상징이 되었으며 오는 6월에 다시 한번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월드컵 감격을 되살리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지금은 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세계13번째 부자나라인 만큼 2002년 월드컵의 그 순간을 기억하여 역경에 처한 우리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뜨거운 가슴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오늘의 위기를 헤쳐나아가야 할 것이다.

2003. 5. 29일

2002 FIFA 월드컵 1주년 추억, 소감

조직위원회 제출용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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