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안데스에 꽃핀 거석문화 - 김 우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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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3-04 17:09 조회 3,876회 댓글 0건본문
잉카의 비밀 공중도시 아! 마추피추 앞에 서다
해발 2400m높이에 계단식 밭·관개수로 등 石造기술 불가사의
수레도 없이 밀고 당겨 100t 가까운 돌덩이 운반
500년 지난 지금도 사용 가능할 정도
페루의 마추피추. 해발 2천400m의 산중에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싸아 건설한 요새 도시로 제례, 주거지, 경작지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과 관개시설이 요새 곳곳에 펼쳐져 있다.
대부분 저지대 평원에 발달했던 마야인들의 옛 도시를 떠나 비행기로 남쪽으로 4~5시간 날아가면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험산준령의 안데스 산맥 북쪽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맥의 서쪽은 해안 사막지대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엔 아마존 밀림을 거느리고 있다. 위도 상으로는 적도라지만 산줄기 꼭대기에는 온통 하얀 눈이다.
안데스 산맥은 남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적도로부터 남극 부근까지 9천㎞나 뻗어 있다.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역되어 널리 불려진 노래 속에 나오는 콘돌(condor)이란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곳도 이 지역이고, 30여년 전에 우루과이 축구선수들이 전지훈련 차 칠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 속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동사한 동료들의 인육을 먹으면서 10주일간의 사투 끝에 살아 돌아온 곳도 이 안데스산맥이다. 이 산맥은 폭도 만만치 않아 200㎞는 보통이며, 가장 넓은 곳은 700㎞가 넘기도 한다. 휴전선 길이 250㎞, 부산에서 평양까지 거리인 600여㎞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무궁무진한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자 선진국들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소위 안데스 국가들에 추파를 보내고 있다. 이 산맥을 국경으로 삼고 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양편 기슭을 따라 유명한 포도주 산지 및 스키장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냉대성 삼림지대가 펼쳐지며, 더 남쪽으로 가면 고지대에서 해안까지 빙하가 전개되면서 크고 작은 빙하계곡과 빙하호가 발달해 있다.
안데스 남부에서는 알프스 산악지방에서처럼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나, 이렇다 할 고대 유적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북쪽으로 갈수록 봉우리는 점점 높아지고, 해안 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죽음의 계곡보다 몇 배는 더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을 포함해 수천㎞에 이르는 사막이 이어지고, 여기저기 고대 문화 유적지들이 보인다. 인간은 험한 자연환경 속에서 꿈과 지혜가 더 잘 생기는지 몰라도, 도저히 살지 못할 곳 같은 그런 고산지대와 사막지대에 어마어마한 도시를 건설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나보다.
고산병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잉카(Inca)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sco)를 처음 찾아간 날, 가벼운 흥분 속에 전통주 한 잔에 토속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잰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누우니 편안하기는커녕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괴로웠다. 객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여름날의 개 모양 혀를 내밀고 헉헉 가쁜 숨을 쉬며 방안을 종종거리다가 문에 붙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쿠스코에 도착한 날에는 술 마시지 말고, 빨리 걷지 말 것이며, 샤워를 하지 마십시오." 해발 3천400m나 되는 곳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잉카제국 이전에 번성했던 티와나코(Tihuanaco)는 3천800m에 위치해 있고, 그나마 숨쉬기 편하다는 마추피추(Machu Picchu)라 해도 2천400m 높이에 있다. 3천년 전에 정착을 하기 시작하여 1천여년간 지속된 페루 최초의 정착 농경 문화인 차빈(Chvin) 문화나, 6세기 무렵 일어나 400년간 페루 북부지역을 장악한 와리(Wari) 제국 모두 이런 지형에 터를 잡고 번영의 꽃을 피웠다. 생각해 보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인도나 중국 같은 고대 문명은 전부 큰 강가의 비옥한 토지를 끼고 발생하였는데, 이 안데스의 고대문명은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돋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은 가벼운 돌이나 목재를 쓰지 않고 한 덩어리에 보통 몇 t 혹은 수십t에서 100t씩 하는 석재로 건축물을 쌓고, 산중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인근도 아닌 30~40㎞ 떨어진 채석장에서 그런 바윗덩어리를 운반해 제단을 쌓고 요새를 지은 곳도 있다. 수레도 몰랐던 때라, 둥근 자갈을 이용해 수백 명이
[사진: 콜롬비아 산아구스틴의 석상. 산아구스틴은 2천500여년 전 안데스 북부에 번성했던 문화 유적지. 조상숭배용으로 추정되는 인물 및 동물 모양의 석상이 곳곳에 있다. ]
[사진: 7세기말까지 페루 북부의 건조한 안데스 저지대 계곡에 발달한 모체왕국의 시판왕 행차 모습. 엄청난 양의 황금 및 보석 액세서리, 부장된 처첩과 병사들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
[사진: 쿠스코의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 15세기 잉카제국의 태양신전터로서, 최대 12각까지 조각하여 이어 맞춘 석조기술이 놀랍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성전 상부를 헐고 그 터 위에 성당을 세웠다. ]
밀고, 당기고, 들어 올려 지은 것이라니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다.
와리 제국의 쇠퇴기 말년에 접근이 어려운 산 정상에 요새 및 주거지로 건설한 쿠엘랍(페루 북부 아마존 인근 산악 지대) 성벽에 사용된 석조 벽돌의 수는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에서 사용된 것보다 3배가 더 많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도시국가 형태로 나타난 마야 문명과는 달리 안데스 지역의 고대 문명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의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제국을 다스리려니 지방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 통신망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15세기 들어 안데스 중북부 지역의 수십개 소국을 평정하며 등장한 잉카제국은 여러 면에서 로마제국에 버금갈만한 정치 조직과 토목 기술을 갖추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 것처럼, 남미에선 모든 길이 쿠스코로 통했다. 해안도로와 산악의 동부 및 서부 도로가 평행으로 달렸고, 이 세 간선 도로를 연결하는 동서 지선 도로를 냈다. 주요 도로는 돌멩이를 깔아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에콰도르부터 아르헨티나 중북부까지 300만㎢ 영토(남한의 30배 규모)에 종횡으로 이어진 잉카 도로의 길이는 물경 4만㎞에 달했다 한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거리다. 스페인 정복자가 오기 전인 당시엔 말도 수레도 없었다. 사람이 이 도로를 달려 황제의 명령을 전하고 물자를 수송하였으며 부대를 이동시켰다. 이 도로를 따라 중간 중간에 휴게소와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다. 잉카황제는 1천만명 이상의 인구를 10명, 100명, 1천명 등 10진법 단위로 집단화했고 1만명을 기준으로 책임자를 임명하여, 국가적 차원의 토목공사나 군대에 국민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부역 체계를 완성하였다. 제국의 영토를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지사가 관장하게 하는 한편 감독관을 파견하여 인구 조사와 재판 임무를 맡겼다.
잉카황제는 제국의 제사장으로서 매년 하지에 쿠스코 인근 삭사이와만(Sacsayhuaman) 제례 구역에서 신하, 군사, 악사, 무희 등을 거느리고 태양제를 주관하였다. 오늘날에도 매년 6월 하순이면 이 태양제를 재현하는 행사를 하는데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운집한다. 스페인어가 아닌 잉카제국의 공용어였던 케추아(Quechua)어로만 이 태양제를 진행하는 점이 흥미롭다. 1년에 한 번 빼앗긴 제국을 기리고, 상징적으로나마 스페인 정복자들을 쫓아내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잉카제국에선 종교, 관청, 주거 시설은 물론이고 곡식 창고, 묘소까지 모두 무거운 돌을 사용하여 짓되 못이나 시멘트를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돌덩어리를 지그재그로 엮어 쌓거나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 각을 만들어 이어 맞추는 방식으로 견고하게 건축하였다. 실제 쿠스코에서 오래 전에 큰 지진이 났을 때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수도원은 무너졌으나, 잉카의 성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다.
남미 최대 최고의 유적지인 마추피추 요새는 잉카 석조 기술의 집대성이다. 제일 높은 곳의 망루부터 저 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부분까지 걸쳐져 있는 계단식 밭과 관개수로에 이르기까지 온통 그 정교한 석조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용 가능할 정도다. 치무(Chimu)나 모체(Moche) 등 북부 해안지대 문화권에서는 돌을 쓰지 않고 그 지역에서 만든 흙벽돌로 신전 피라미드와 도시를 건설하였기에 1천여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퇴락하여 대강의 외양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
또 안데스의 북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콜롬비아의 산아구스틴(San Agustin)에는 이렇다 할 건축물도 없이 유래를 모르는 거대한 석상들만이 여기저기에 우뚝우뚝 서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연상되기도 한다. 안데스의 거석들은 그 무게 만큼의 중력으로 우리를 신비한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국제실무외국어학부 교수>
------- 영남일보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90129.010220756390001 ------------------------------------------
해발 2400m높이에 계단식 밭·관개수로 등 石造기술 불가사의
수레도 없이 밀고 당겨 100t 가까운 돌덩이 운반
500년 지난 지금도 사용 가능할 정도
페루의 마추피추. 해발 2천400m의 산중에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싸아 건설한 요새 도시로 제례, 주거지, 경작지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과 관개시설이 요새 곳곳에 펼쳐져 있다.
대부분 저지대 평원에 발달했던 마야인들의 옛 도시를 떠나 비행기로 남쪽으로 4~5시간 날아가면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험산준령의 안데스 산맥 북쪽 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맥의 서쪽은 해안 사막지대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엔 아마존 밀림을 거느리고 있다. 위도 상으로는 적도라지만 산줄기 꼭대기에는 온통 하얀 눈이다.
안데스 산맥은 남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적도로부터 남극 부근까지 9천㎞나 뻗어 있다.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역되어 널리 불려진 노래 속에 나오는 콘돌(condor)이란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곳도 이 지역이고, 30여년 전에 우루과이 축구선수들이 전지훈련 차 칠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눈 속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동사한 동료들의 인육을 먹으면서 10주일간의 사투 끝에 살아 돌아온 곳도 이 안데스산맥이다. 이 산맥은 폭도 만만치 않아 200㎞는 보통이며, 가장 넓은 곳은 700㎞가 넘기도 한다. 휴전선 길이 250㎞, 부산에서 평양까지 거리인 600여㎞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어림할 수 있을 것이다.
무궁무진한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자 선진국들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소위 안데스 국가들에 추파를 보내고 있다. 이 산맥을 국경으로 삼고 있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양편 기슭을 따라 유명한 포도주 산지 및 스키장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냉대성 삼림지대가 펼쳐지며, 더 남쪽으로 가면 고지대에서 해안까지 빙하가 전개되면서 크고 작은 빙하계곡과 빙하호가 발달해 있다.
안데스 남부에서는 알프스 산악지방에서처럼 천혜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나, 이렇다 할 고대 유적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북쪽으로 갈수록 봉우리는 점점 높아지고, 해안 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죽음의 계곡보다 몇 배는 더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을 포함해 수천㎞에 이르는 사막이 이어지고, 여기저기 고대 문화 유적지들이 보인다. 인간은 험한 자연환경 속에서 꿈과 지혜가 더 잘 생기는지 몰라도, 도저히 살지 못할 곳 같은 그런 고산지대와 사막지대에 어마어마한 도시를 건설하고,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나보다.
고산병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잉카(Inca)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sco)를 처음 찾아간 날, 가벼운 흥분 속에 전통주 한 잔에 토속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잰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자리에 누우니 편안하기는커녕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괴로웠다. 객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여름날의 개 모양 혀를 내밀고 헉헉 가쁜 숨을 쉬며 방안을 종종거리다가 문에 붙은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쿠스코에 도착한 날에는 술 마시지 말고, 빨리 걷지 말 것이며, 샤워를 하지 마십시오." 해발 3천400m나 되는 곳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잉카제국 이전에 번성했던 티와나코(Tihuanaco)는 3천800m에 위치해 있고, 그나마 숨쉬기 편하다는 마추피추(Machu Picchu)라 해도 2천400m 높이에 있다. 3천년 전에 정착을 하기 시작하여 1천여년간 지속된 페루 최초의 정착 농경 문화인 차빈(Chvin) 문화나, 6세기 무렵 일어나 400년간 페루 북부지역을 장악한 와리(Wari) 제국 모두 이런 지형에 터를 잡고 번영의 꽃을 피웠다. 생각해 보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고 인도나 중국 같은 고대 문명은 전부 큰 강가의 비옥한 토지를 끼고 발생하였는데, 이 안데스의 고대문명은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돋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은 가벼운 돌이나 목재를 쓰지 않고 한 덩어리에 보통 몇 t 혹은 수십t에서 100t씩 하는 석재로 건축물을 쌓고, 산중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인근도 아닌 30~40㎞ 떨어진 채석장에서 그런 바윗덩어리를 운반해 제단을 쌓고 요새를 지은 곳도 있다. 수레도 몰랐던 때라, 둥근 자갈을 이용해 수백 명이
[사진: 콜롬비아 산아구스틴의 석상. 산아구스틴은 2천500여년 전 안데스 북부에 번성했던 문화 유적지. 조상숭배용으로 추정되는 인물 및 동물 모양의 석상이 곳곳에 있다. ]
[사진: 7세기말까지 페루 북부의 건조한 안데스 저지대 계곡에 발달한 모체왕국의 시판왕 행차 모습. 엄청난 양의 황금 및 보석 액세서리, 부장된 처첩과 병사들의 유골이 발굴되면서 유명해졌다. ]
[사진: 쿠스코의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 15세기 잉카제국의 태양신전터로서, 최대 12각까지 조각하여 이어 맞춘 석조기술이 놀랍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성전 상부를 헐고 그 터 위에 성당을 세웠다. ]
밀고, 당기고, 들어 올려 지은 것이라니 벌어진 입을 닫을 수가 없다.
와리 제국의 쇠퇴기 말년에 접근이 어려운 산 정상에 요새 및 주거지로 건설한 쿠엘랍(페루 북부 아마존 인근 산악 지대) 성벽에 사용된 석조 벽돌의 수는 이집트 최대의 피라미드에서 사용된 것보다 3배가 더 많다고 한다. 여기저기에 도시국가 형태로 나타난 마야 문명과는 달리 안데스 지역의 고대 문명은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의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제국을 다스리려니 지방 곳곳을 연결하는 교통, 통신망은 필수적이었다. 특히 15세기 들어 안데스 중북부 지역의 수십개 소국을 평정하며 등장한 잉카제국은 여러 면에서 로마제국에 버금갈만한 정치 조직과 토목 기술을 갖추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 것처럼, 남미에선 모든 길이 쿠스코로 통했다. 해안도로와 산악의 동부 및 서부 도로가 평행으로 달렸고, 이 세 간선 도로를 연결하는 동서 지선 도로를 냈다. 주요 도로는 돌멩이를 깔아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에콰도르부터 아르헨티나 중북부까지 300만㎢ 영토(남한의 30배 규모)에 종횡으로 이어진 잉카 도로의 길이는 물경 4만㎞에 달했다 한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거리다. 스페인 정복자가 오기 전인 당시엔 말도 수레도 없었다. 사람이 이 도로를 달려 황제의 명령을 전하고 물자를 수송하였으며 부대를 이동시켰다. 이 도로를 따라 중간 중간에 휴게소와 창고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다. 잉카황제는 1천만명 이상의 인구를 10명, 100명, 1천명 등 10진법 단위로 집단화했고 1만명을 기준으로 책임자를 임명하여, 국가적 차원의 토목공사나 군대에 국민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부역 체계를 완성하였다. 제국의 영토를 여러 지방으로 나누어 지사가 관장하게 하는 한편 감독관을 파견하여 인구 조사와 재판 임무를 맡겼다.
잉카황제는 제국의 제사장으로서 매년 하지에 쿠스코 인근 삭사이와만(Sacsayhuaman) 제례 구역에서 신하, 군사, 악사, 무희 등을 거느리고 태양제를 주관하였다. 오늘날에도 매년 6월 하순이면 이 태양제를 재현하는 행사를 하는데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람객이 운집한다. 스페인어가 아닌 잉카제국의 공용어였던 케추아(Quechua)어로만 이 태양제를 진행하는 점이 흥미롭다. 1년에 한 번 빼앗긴 제국을 기리고, 상징적으로나마 스페인 정복자들을 쫓아내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잉카제국에선 종교, 관청, 주거 시설은 물론이고 곡식 창고, 묘소까지 모두 무거운 돌을 사용하여 짓되 못이나 시멘트를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돌덩어리를 지그재그로 엮어 쌓거나 바위를 정교하게 깎아 각을 만들어 이어 맞추는 방식으로 견고하게 건축하였다. 실제 쿠스코에서 오래 전에 큰 지진이 났을 때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수도원은 무너졌으나, 잉카의 성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다.
남미 최대 최고의 유적지인 마추피추 요새는 잉카 석조 기술의 집대성이다. 제일 높은 곳의 망루부터 저 아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끝부분까지 걸쳐져 있는 계단식 밭과 관개수로에 이르기까지 온통 그 정교한 석조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용 가능할 정도다. 치무(Chimu)나 모체(Moche) 등 북부 해안지대 문화권에서는 돌을 쓰지 않고 그 지역에서 만든 흙벽돌로 신전 피라미드와 도시를 건설하였기에 1천여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퇴락하여 대강의 외양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
또 안데스의 북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콜롬비아의 산아구스틴(San Agustin)에는 이렇다 할 건축물도 없이 유래를 모르는 거대한 석상들만이 여기저기에 우뚝우뚝 서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연상되기도 한다. 안데스의 거석들은 그 무게 만큼의 중력으로 우리를 신비한 세계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국제실무외국어학부 교수>
------- 영남일보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90129.01022075639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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